국내여행/한 걸음의 의미-도보여행(2003)

나홀로 국토 종단 도보 여행기(4) 강진군-장흥군

anna325 2007. 1. 19. 13:29

 

시인 김영랑 생가

<3일째>
2003년 6월 22일 일요일 날씨 : 흐림
강진군 -> 장흥군, 약 15km, 10시-14시 30분

아침에 6시 조금 넘어서 일어났다. 할머니는 옆에 공소에 가셔서 5시 새벽 미사를 보셨다고 한다. 난 여행오면 눈이 일찍 떠진다. 아무리 피곤해도 어쩔 수 없는 현상. 세수하고 화장실 갔다가 와 보니 할머니는 오셔서 쌀 씻고 계신다. 아침은 집 떠나고 처음으로 먹어보겠다. 그 사이 난 일기 쓰고 " 뭐 도와드릴꺼 없어요?" 그랬더니 " 뭐 도울 거 있다구. 이제 밥해서 먹으면 되지." 그러신다. 콩나물 국, 계란 부침, 김치, 새우젓 무침, 부추 김치로 상을 봐 주셨다. 밥도 많이도 주셨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다시 강진까지는 버스타고 간다. 근데 8시 15분 차여서 40분 정도 남는다. 그 사이에 들었던 할머니 인생 이야기는 정말 슬펐다. 열 아홉살에 결혼하셔서 남편과 인천에서 3개월간 같이 사시다 잠깐 광주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 사이 한국전쟁이 나서 남편을 잃으셨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지금 일흔이 넘으실 때까지 혼자 사신다는 것이다. 마음이 어찌나 짠하던지. 내가 밥 먹으면서 "자녀분들은 다 도시로 나가서 사세요?" 라고 했더니 " 나는 자식 없어." 그러셔서 괜한 거 여쭈었구나 싶은 게 진짜 죄송했었는데 그런 사연이 있으셨구나. 그러면서 쉰 살 되시던 해 천주교에 입문하셨는데 그때부터는 행복하게 사셨다고 한다.
" 인생을 살면서 항상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여. 그간 그렇게 울 일이 많았어도 지금은 이렇게 좋게 살잖여. 너도 여행하다보면 좋은 때도 있고 힘든 때도 있을 것이여."
그러신다. '할머니, 저도 알아요. 얼마 살아보진 않았지만 그동안 저도 순탄하게 산 것만은 아니니까요. 지금 하는 여행도 그래서 하는 거예요.' 속으로 그랬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도 끝내 안 찍으신다. 공소 앞에 성모상만 찍으라고 하셔서 그것만 찍었다. 나오지 말라고 해도 버스 타는데 까지 따라 나오신다. 꼭 우리 할머니 같다. 여행하면서 정말 좋은 분 많이 만난다. 아직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도. 꼭 감사를 배우러 여행하는 거 같다. 이렇든 저렇든 좋아!

버스 타고 강진 다 와서 옆을 무심코 보니 영랑생가 표지판이 보인다. 그래서 얼른 내렸다. 복원해 놓은 것이라는데 안채와 사랑채, 곳간, 머슴(?)이 기거하던 방이 있다. 내가 오늘 첫 방문객이다. 아직 8시 30분 정도 밖에 안 되었으니까. 사진 찍고 좀 있으려니까 방문도 열어 놓으신다. 그래서 더 구경하다가 장흥으로 출발했다. 15km 정도 된다. 오늘은 정말 여기까지만 가야지. 다리 아파서 더는 못 간다.

아파트는 아까부터 보이는데 역시 길은 구불 구불. 오늘은 얼마 안 걸었으니까 봐준다. 중간에 버스 승강장에서 쉬는데 한 아주머니가 버스타러 오셨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으잉?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 많이 했어도 이런 대답 들어보긴 처음이다.)
"장흥가요? 거그 버스 아까 간 거 아니요?"
"저는 걸어서 가요. 걸어서 여행 중이거든요.."
"뭐여? 큰애기(처녀란 뜻인 듯함) 혼자? 동무도 없이 혼자 워치케 여행허요?"
"그냥요."
"누가 잡어가믄 워치켜. 엄마가 암말도 안혀요.?"
"걱정 많이 하시죠."
모르는 분들이 우리 부모님보다 더 걱정이시다.

차도 많이 안 다니는 조용한(?) 국도 길이다. 장흥을 1km 정도 남겨두고 초등학교가 있길래 벤치에 누워 쉬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다. 근데 자꾸 잠이 들려고 한다. 그래서 얼른 일어났다.(얼른이 30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또 어디서 자나? 매일 그게 문제다.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여인숙조차 찾을 수 없다. 참다 못한 나. 읍사무소 보이길래 들어갔다. 아저씨 두 분이 계신다. 그래서 찜질방 있으면 소개해 달랬다. 그러나 나에게 들려오는 청천벽력같은 한 마디!

"24시간 하는디는 읎는디요."
그럼 나는 워쩌요? 여인숙은 있는데 13000원이란다.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체념하는 찰나, 아까부터 이것 저것 물으시던 저쪽 아저씨께서
"괜찮으믄 우리집이서 잘라요? 빈 방이 하나 있긴 한디."
이 무슨 행운이냐! 오늘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 그 길로 직접 태워다 주셨다. 근데 집이 엄청 좋다. 이층집이다.
점심 안 먹었다고 하니 점심도 주시고(3시 다 된 시각) 뜨거운 물로 잘 씻었다. 근데 내가 이런 은혜를 입어도 될 만큼 좋은 사람인가. 자꾸 미안해진다. 부모님, 아저씨 부부, 딸 셋이 사신다.
아~ 발은 장난이 아닌데. 마음도 무거운데.
그래도 나의 여행은 계속된다. 쭈욱~~

내일은 보성을 향해 가보자.
근디 전라도에는 정녕 24시간 하는 찜질방이 읎는가.
부여 그 조그만 곳에도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