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한 걸음의 의미-도보여행(2003)

나홀로 국토 종단 도보 여행기(28) 양양군 죽도해수욕장-속초시

anna325 2007. 1. 19. 17:15

 

낙산사 의상대

<27일째>
2003년 7월 16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양양군 죽도 해수욕장 -> 속초시, 약 36km, 7시 30분-6시 30분

아침에 7시쯤 눈을 떴다. 오늘은 양양을 거쳐서 속초까지 갈 계획이다. 중간에 낙산사도 들렀다 갈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바다는 어제와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서 파도를 만든다. 아름답다. 역시나 오늘도 7번국도 왕복 4차선 도로이다. 오늘따라 발이 무겁다. 배낭도 더 무겁게 느껴지고 무릎도 아픈 것 같고. 암튼 몸 상태가 별로이다. 그래도 나는 간다. 나의 꿈을 향해서.

한 6km정도 가니까 하조대가 있는 현북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이름을 보아하니 바다가 보이는 누각일 것 같은데 면소재지 입구에 세워놓은 하조대 사진을 보니까 우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있다. 바다의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만큼 깎아지른 절벽 위에 절묘하게 지어져 있는 누각의 모습은 정말 한 폭의 동양화였다. 근데 이정표를 따라가 보니까 하조대 휴양지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마도 군인들만 출입하는 휴양지인 것 같았다. 관리실에서 군인이 나와서는
"어떻게 오셨어요?"
한다.
"여기 하조대가 있다고 해서 그거 보러 왔거든요? 여기가 아닌가요?"
"민간인이세요? 여기는 군인 가족하고 군인 밖에는 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하조대는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나요? 절벽 위에 누각도 있고 그렇던데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 참, 난감했다. 아까 이정표에는 분명히 1km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쯤이 1km정도가 될 텐데 눈 씻고 찾아 봐도 어디에도 정자 비슷한 것도 없다. 이론~ 실망을 하고 다시 내려왔다. 다리도 아픈데 헛걸음했다. 분명 어딘가 있기는 할 텐데 내가 못 찾고 있나 보다. 그래서 어쨌든 하조대는 못봤다. 사진으로만 '아~ 좋다'하고 말았다. 이궁~ 체념하고 다시 나와서 가던 길 열심히 열심히 걸었다.

양양이 한 9km정도 남은 곳을 지나가자니 반가운 표지판이 보인다. 바로 드라마 '가을 동화'를 찍었다는 상운 폐교가 국도에서 2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준서가 그림 그리는 작업실로 썼던 곳이 바로 이 상운폐교이다. 가을 동화는 정말 예쁜 영상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준서와 은서의 어린 시절에 나왔던 시골의 푸른 영상은 마치 그림을 그린 듯이 아름다웠었다. 별로 멀지도 않은데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 속에 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보다는 약간 작을까. 아주 아담한 학교이다. 원래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가 임대한 곳인데 소설가 김하인씨가 소설에 소개하면서 드라마까지 찍게 되었단다. 운동장은 풀이 무성해서 언뜻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인 줄 알겠다. 안처럼 바깥도 좀 더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으면 더 예쁜 곳이 될 것 같은데 그게 좀 아쉬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인 듯한 도예가가 앉아 계셨다. 그 분이 만드신 듯한 여러 가지 도자기와 컵, 열쇠고리, 장식품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모두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격도 별로 비싸지 않고 예쁜 것들이 많았지만 돈도 없었을 뿐더러 무거울 것 같아서 사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었는데 그것도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좀 더 여유롭게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꼭 해봐야지 하고 마음먹었을 따름이다. 각 교실들은 테마별로 꾸며 놓았다. 은서방, 준서방, 차 마시는 방, 책 읽는 방 등등.

참 아기자기했다. 나오다가 소설가 김하인씨도 보게 되었다. 소설도 몇 편 읽어 봤는데 나는 그다지 큰 감동이나 인상같은 것은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냥 '아, 김하인씨구나.' 라고 생각만 했을 뿐 그냥 지나쳤다. 혹시 신경숙 작가라면 싸인이라도 받으려고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말이나 한 번 해 볼 걸 그랬나? 하지만 별로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구경 잘하고 다시 양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과 점심은 어제 사놓은 빵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그런지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집에 돌아가면 반찬이 김치 하나라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해 하며 먹을 것이다. 정말이다.

양양은 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시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속초를 향해 갔다. 힘도 들고 길도 인상적이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낙산사 입구 주변에 와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여기도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와 본 것 같은데 오죽헌처럼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무래도 정말 눈감고 다녔나 보다. 이론~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매표소. 청소년 표 1500원, 어른 표 2000원. 천원이나 차이가 났다. 다시 정중히 부탁했다.

"제가 한 달이나 여행하느라고 경비가 모자라거든요. 청소년 표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인상이 무척이나 차갑게 생긴 여직원이었는데 선뜻 알았다며 청소년 표를 끊어 주셨다. 다행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일단 낙산사 본당부터 구경했다. 산사에 올 때마다 늘 느끼는 건데 고전 건축에 대해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매번 실행을 못해서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종교가 불교는 아니지만 불교는 삼국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문화의 한 부분이니 신자가 아니라도 한번쯤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랫동안 우리 국민의 정서를 반영한 예술품이라 할 수 있으니까. 이번에 돌아가게 되면 불교 미술, 건축에 대해서 꼭 공부해 봐야겠다.

내가 여기서 정작 가보고 싶었던 곳은 의상대이다. 신라시대 최고의 승려하면 원효와 의상을 들 수 있는데 낙산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의상대가 서 있는 바위에서 참선에 들곤 했다는 것이다. 누각은 물론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었다. 의상대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탁트인 바다가 눈 안으로 한가득 차오른다. 청명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좋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생각한 거지만 우리나라 정말 어느 곳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어딜가나 탄성과 함께 할 말을 잃게 되고 마는 최고의 풍경을 선사한다. 이 곳도 마찬가지. 부여의 낙화암을 연상시키는 곳이기도 했다. 절벽 밑에 바다가 아니라 백마강 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관광지라 그런지 여느 산사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기분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시간이었다.

의상대에서 바라본 바다는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낙산사를 내려오니 바로 낙산 해수욕장이다. 제법 알려진 곳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고 호텔, 모텔도 많다.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해수욕장도 호텔도 모두 '그림에 떡'이지. 에구.

속초까지는 약 12km 정도 남았다. 낙산사를 둘러보고 나니 시간이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12km면 내 걸음으로는 3시간 정도 걸리는데 서둘러야 했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서 무서운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눈에 들어오는 건 식당밖에 없더군. 배가 넘 고팠지만 속초에 도착하기 전까진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부지런히 걸어서 드디어 속초 시내에 들어왔다. 3시간 거리를 2시간만에 주파. 열심히 걸은 보람이 있었다.

우선 분식집에 들어가 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랜 후 근처에 파출소로 가서 찜질방을 알아낸 뒤 또 걸었다. 파출소에서 한 1km쯤 떨어져 있었다. 4층 짜리 건물이 허허 벌판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사우나까지 같이 하는 곳이었다. 그 앞에는 청초호라는 호수가 있었다. 찜질방은 시설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7000원으로 여전히 비쌌다. 강원도는 사계절 관광지라더니 물가가 다른 곳 보다 비싼 것 같다. 그래도 4층으로 올라가서 바라본 청초호 주변의 야경은 정말 멋있었다. 도시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멋을 느낄 수 있다더니 정말 그랬다.

창문에 얼굴을 대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가 새삼 여행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일기장을 처음부터 읽어보기 시작했다. 무작정 시작했던 여행도 이제 정말 끝나가는구나.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게 힘든 순간도 많았었는데. 끝나고 나면 늘 그랬듯이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추억으로 간직되겠지.
남은 이틀도 무사히 지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