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일본(2019)

오키나와 여행기(3일차, 2019.8.1.목)-[토카시키 섬] 토카시키 섬, 아하렌 비치 해수욕

anna325 2021. 10. 14. 23:28

(이 글에서 설명은 '프렌즈 오키나와-전명윤, 김영남'을 참고하여 썼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자서 머리도 멍하고 온몸이 찌뿌둥했다. 엄마는 그래도 좀 주무셔서 다행이다. 엄마는 원래 6시 전에 일어나시는데 나는 잠을 못자서 엄마가 일어나실 때 나도 같이 일어났다. 여름이라 그런지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너무 일찍 일어나는 통에 아침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무엇을 할까 하다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는 어제 마을 산책을 할 때 눈여겨 보아 두었던 샌드위치와 주먹밥을 파는 가게에 가보기로 했다.

 

숙소를 나서기 전에 숙소 모습을 담아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숙소처럼 보이지만 방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치 판타지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그 때부터 지옥의 문이 열리는 이상한 나라의 숙소이다. 우리는 가운데로 나있는 중앙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 중간쯤 방에 머물렀었다. 1층의 오른쪽으로는 너무나 맛이 없고 양도 적어서 실망스러웠던 식사를 두 번이나 했었던 식당이 있고 중앙 계단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검은 문은 주인 할머니로 추정되는 할머니가 사시는 가정집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퇴실할 때 방 열쇠를 반납하러 식당에 갔더니 아무도 없어서 저 문을 두드려 보니 할머니가 나오셔서 열쇠를 받으셨다. 3층으로 올라가면 어젯밤에 목이 아프도록 별을 보았던 옥상이 나온다.

샌드위치 가게는 숙소에서 한 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데 식당이 아주 작고 아담했다. 식당 이름은 'Sunny Coral'. 젊은 남자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가게로 영어가 가능했고 샌드위치, 주먹밥, 간단한 도시락, 커피 등을 팔고 있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메뉴판을 보다가 아침에 컵라면이랑 같이 먹을 샌드위치와 주먹밥을 한 개씩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샌드위치와 주먹밥을 만들어 주셨다. 수첩에 적어 놓지 않아서 어떤 종류의 샌드위치와 주먹밥을 주문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쉽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컵라면과 함께 샌드위치와 주먹밥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둘 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샌드위치가 약간 짰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라면이랑 같이 먹으니 꿀맛이었다. 라면은 언제 어디서나 한국인의 소울 푸드이다.

 

일본 생수. 사서 마셨는지 아니면 어디서 받은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유통기한이 2년 정도 되나 보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주인 할머니에게 방 열쇠를 반납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아하렌 비치로 가는 날이라 숙소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아하렌 비치에서 하룻밤 지낼 숙소는 '마린 팰리스'(1박 21,440엔, 245,244원, 석식과 조식 포함, 부킹닷컴 예약)로 무척 비싼 숙소였는데 예약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숙소 중에는 그나마 저렴한 숙소였다. 석식과 조식을 제공하는 걸 보니 민숙인 것 같았다. 짐을 가지고 길가로 나와 마린 팰리스에서 우리를 데리러 올 차를 기다렸다. 한국에서 마린 팰리스를 예약하고 며칠 후에 마린 팰리스 업체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 당일 픽업을 하러 갈테니 토카시키 항에 몇 시쯤 도착하는지 알려달라는 메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이풀 칭구시'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는 거라 조이풀 칭구시 앞으로 아침 9시 30분까지 와 달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알겠다고 다시 메일을 보내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에 픽업을 하러 오지 않았다면 택시를 타고 가거나 토카시키 항에서 출발하는 승합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택시는 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승합 버스는 짐이 많기도 하고 하루에 3~4편 정도로 적게 운행을 해 한참을 기다려야 하니 픽업을 하러 와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잠도 못자고 일찍 일어날 줄 알았으면 아침 9시쯤 와 달라고 할 걸 그랬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8시 30분쯤 나왔더니 9시 30분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동안 짐은 우체국 주차장 한 쪽에 놓아두고 근처 집들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하늘은 정말 맑고 푸르러서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어느 집이나 대부분 대문 기둥에 저렇게 시샤를 올려두었다. 이 집도 소박하고 깔끔하게 단장을 한 지극히 일본스러운 집이었다. 

 

숙소에서 항구 쪽으로 난 길도 한 번 찍어보았다. 어제 숙소로 올 때 이 길을 걸어서 왔었다. TV에서 많이 보았던 전형적인 일본의 시골 마을길의 모습이다. 집집마다 쌓아 올린 페인트 칠도 하지 않은 벽돌 담장이 인상적이다. 왼쪽으로 보이는 공터는 우체국 앞에 있는 주차장이었다. 

그렇게 여기 저기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9시 30분이 가까워 왔다. 9시 20분이 되었을 무렵부터 길 위로 지나다니는 차를 눈여겨 보며 '이 차인가? 저 차인가?' 하면서 오늘 묵을 숙소에서 오는 차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9시 30분이 되자 골목 끝에서 은색 미니 봉고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저 차인가?'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그 봉고차는 어젯밤 우리가 묵었던 숙소 앞에 서더니 운전석에서 문을 열고 젊은 남자가 내려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침내 우리를 데려다 줄 숙소의 차가 도착한 것이다. 직원은 우리를 차로 안내하여 안전하게 앉게 하고 짐을 싣고는 드디어 아하렌 비치로 출발했다. 토카시키 마을에서 아하렌 마을까지는 약 15분 정도 걸린 것 같다. 토카시키 마을에서 아하렌 마을로 가려면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차가 산 위로 올라가자 저 멀리 아하렌 비치 앞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자 우리도 모르게 "와!"하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산을 내려가 조금 더 가니 아하렌 마을이 나오고 좁은 골목길을 지나자 오늘 우리가 묵을 '마린 팰리스' 숙소가 보였다. 직원은 숙소 앞에 차를 대고 친절하게도 짐을 내려 숙소 1층에 있는 식당까지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쓸 방은 아직 청소가 덜 되어서 이따 2시쯤 입실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물으니 1층에 비어 있는 큰 방이 있으니 원하면 거기에 두어도 된다고 해서 짐을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와 내일 아침 식사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는 것을 보니 직원인 줄로만 알았던 이 분이 이 곳 사장님인 것 같았다. 사장님이 무척 친절해서 숙소에 대한 첫 인상이 아주 좋았다. 식당 한쪽에는 투숙객들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센스있게 커피 머신과 차와 보온 포트를 준비해 놓은 게 보였다. 사장님의 세심한 배려가 여기에서도 느껴졌다. 

사장님의 안내가 끝나고 우리는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아하렌 비치에서 해수욕을 즐길 예정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여행오기 전날 밤에 집 근처 다이소에서 산 돗자리와 가방에 지갑을 챙긴 후 룰루랄라 길을 나섰다. 숙소에서 아하렌 비치까지는 한 5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었는데 오르막길을 조금 올라가자 금새 시야가 확 트이면서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아하렌 비치는 일본 제일의 비치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비치라고 한다. 널찍한 해변, 부드러운 산호 모래, 바닥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물빛과 풍경을 돋보이게 하는 바위산은 해변이 가져야 할 모든 미덕을 한데 품은 느낌이다. 천연 해변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경 또한 일품인데 활처럼 굽은 만의 형태라 태풍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늘 파도가 잔잔해 어린이를 동반한 초보 스노클링 여행자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미야코 블루와 함께 오키나와의 2대 블루로 꼽히는데 그래서 마을 규모도 어제 묵었던 토카시키 마을보다 아하렌 마을이 더 크다고.

 

궁금한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가보니 고운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는 투명하고 맑은 바닷물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게다가 더 좋았던 건 여름 성수기였는데도 사람이 많이 없어서 호젓하고 여유있게 바다를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백사장과 바다에는 쓰레기도 하나 없이 깨끗해서 더 더욱 좋았다.

지형을 보니 지난 겨울에 신혼여행으로 갔었던 하와이의 '하나우마 베이'를 닮아 있었다. 혹시 이 해변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해변 입구에 식당과 민박집, 물놀이 용품점들이 모여 있어 편리했다. 우리는 해변 입구에 있었던 물놀이 용품점에서 파라솔 1개(1,500엔, 16,380원)와 대형 튜브 2개(1개 500엔, 5,460원)를 빌렸다. 지금 여름 성수기인데도 그 정도 가격이면 바가지 요금도 없고 무척 착한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아하렌은 이모저모로 참 마음에 드는 마을이다. 파라솔은 가게 직원이 직접 해변으로 들고 와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 세워주었다. 파라솔 그늘 밑에 돗자리를 깔고 짐을 내려 놓았다. 엄마와 이렇게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물놀이를 하는 것은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2018년 1월에 태국 푸켓의 카론 비치 이후로 1년 만이다. 

바닷물이 정말 맑고 깨끗했다. 카론 비치도 맑고 깨끗했는데 여기는 마치 생수를 채워놓은 것처럼 바닥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정말 맑았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바다는 내 인생에서 처음이다. 파도도 잔잔하고 수심도 얕아서 어른들 뿐만아니라 아이들도 안심하고 놀 수 있었다. 그리고 해변 가까이까지 작은 물고기들이 놀러와서 물안경을 끼고 물고기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물고기도 보고 엄마랑 같이 튜브타고 물놀이도 하고 돗자리에 누워 쉬기도 하면서 놀다 보니 어느 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왔다. 아침을 너무 일찍 먹은데다 물놀이까지 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팠다. 그럼 슬슬 점심을 먹으러 가볼까?

 

오늘 점심을 먹을 식당은 가이드북에 소개되어 있던 '마사노텐'이다. 아하렌 비치에서 마을 쪽으로 약 3분 정도 걸어가면 길 왼쪽으로 식당이 보이는데 식당 규모가 작아서 별 생각없이 걸어가다가는 그냥 지나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해변 근처에 마땅히 식사를 할 만한 식당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식당 안에 손님들로 꽉 차서 밖에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우리 앞에도 기다리는 손님들이 한 팀 있어서 그 손님들 뒤에 줄을 섰다. 한 30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주방 바로 앞에 있는 긴 식탁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음식을 주문하려고 주방 위에 걸려 있는 칠판을 보니 일본어로 메뉴가 적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우리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친절하게 음식 사진과 영어 이름이 써 있는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그 메뉴판을 보고 우리가 시킨 음식은 '오키나와 소바(700엔, 7,644원)', '돈카츠 정식(800엔, 8,736원)'이었다. 한국에서 가이드북을 읽을 때 오키나와 소바가 대표 음식이라는 것을 알고 여행 중에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먹어보게 되는구나. 

원래 일본에서 소바는 메밀 국수를 뜻하는데 오키나와 소바는 특이하게 밀가루로 면을 만든다. 면발은 쫄깃쫄깃한 일본의 우동이나 소바의 면발과는 달리, 툭툭 끊어지고 거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면을 만드는 방법에서 비롯된 것인데 오키나와에서는 숙성하지 않은 생 반죽으로 면을 뽑고 바로 물에 삶은 후, 기름을 발라 보관하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습도가 높은 오키나와에서 반죽을 숙성하다 보면 절반은 쉬어버렸기 때문에 장기 보존을 위해서는 일단 삶아서 보관해야 했다고 한다. 국물은 가쓰오부시와 돼지 뼈 혹은 닭 뼈를 혼합한 국물을 사용한다. 국물을 뽑는데 상당히 정성을 기울이는 편인데, 특히 고기 뼈에서 날 수 있는 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가쓰오부시 맛이 강해 무척 시원하다고 한다. 고명은 일반적으로 소바 위에 삼겹살과 가마보코(어묵)를 한 조각씩 얹는데 최근에는 돼지 갈비인 소키, 돼지 족발인 데비치를 얹어 먹는 화려한 소바가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오키나와 현지 사람들은 돼지 곱창을 넣은 나카미 혹은 부타모쯔 소바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우리가 시킨 소바는 어떤 맛일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음식이 나오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드디어 나온 오키나와 소바. 정말 가이드북에서 읽은 대로 삼겹살 구이 두 점과 어묵 한 조각이 고명으로 올려져 있었다. 면발은 넓적하고 얇은 면으로 라면 면발처럼 꼬불꼬불했다. 그럼 이제 한 번 먹어볼까? 한 젓가락을 먹었는데 음! 맛이 꽤 괜찮은 걸! 국물도 한 숟가락 떠 먹어 보니 고기 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가쓰오부시 맛이 나면서 깊고 시원했다. 고명으로 올려져 있는 삼겹살도 두툼하게 구워서 소바와 같이 먹으니 맛이 썩 괜찮았다. 다만 양이 1인분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적은 감이 있어서 좀 아쉬웠다. 평소 먹는 양이 많은 사람은 두 그릇을 시켜서 먹어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로 나온 음식은 돈카츠 정식이다. 한국에서 일본식 돈까스를 시키면 나오는 것과 모습이 똑같았다. 바삭바삭하게 튀긴 돈까스와 감자샐러드를 얹은 야채 샐러드, 오이 장아찌 비슷한 반찬, 그리고 밥과 미소 된장국이 같이 나왔다. 돈까스를 하나 먹어보니 정말 갓 튀겼는지 바삭바삭 소리가 청명하게 났다. 고기도 두툼하고 잡내도 없어서 맛이 꽤 괜찮았다. 돈까스와 밥만 먹으면 목이 막히니 한 번씩 미소 된장국도 떠 먹어야지. 샐러드 드레싱도 새콤하니 맛있고 밥도 많이 나와서 든든하고 맛있게 한 끼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 모녀는 원래도 국수와 돈까스를 무척 좋아하는데 일본에 와서 일본 정통 국수와 돈까스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음식 맛도 좋아서 더 행복했다. 

계산을 하려고 나올 때 보니 아직도 식당 안에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어제 머물렀던 토카시키 마을에도 이런 식당이 한 두 곳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어제 숙소 식당에서 먹은 음식들에 비하면 오늘은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나올 때 찍은 식당 모습. 보기에는 작고 허름하지만 그래도 맛은 정말 좋았던 '마사노텐' 식당이었다.

 

점심을 먹고 숙소에 들렀다. 오후에는 방이 정돈이 된다고 하여 방에 짐을 옮겨 놓기 위해 들른 것이다. 우리 방은 2층이어서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들어가니 여기도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어제 묵은 숙소가 너무 낡고 허름하고 지저분해서 너무나 놀란 나머지 여기는 어떤지 여기저기 한참이나 둘러 보았다. 다행히 방도 그렇고 욕실도 그렇고 어제 묵은 숙소에 비하면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특히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방을 샅샅히 훑어 보았는데 개미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서 너무나 좋았다. 

 

욕실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욕조도 있고 이 정도면 굉장히 깨끗한 편이었다. 손 세정제, 바디워시, 삼푸, 린스가 정갈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진 오른쪽으로는 옷을 걸 수 있는 벽장이 하나 있었고 벽장 앞에는 깨끗한 이부자리가 잘 개어져 있었다. 두 명이서 묵기에는 방도 꽤 넓은 편이어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숙소에 짐을 옮겨 놓고 다시 물놀이를 하러 출발했다. 그런데 문득 아침에 숙소 직원이 우리를 픽업해 올 때 마을에 있던 슈퍼를 알려주었던 것이 생각이 나 한 번 들러보기로 했다. 슈퍼에 들어가 보니 여기도 역시 무척 작고 허름해 우리네 구멍가게 수준이었는데 그래도 도시락에 아이스크림, 과자, 식재료, 물놀이 용품 등 없는 것 빼고 있을 건 다 있었다. 나는 해외 여행을 가면 그 나라 슈퍼에 꼭 들러서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떤 걸 먹고 쓰고 입는지 둘러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엄마랑 이것저것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좋아하는 초코칩이 들어간 과자 한 봉(330엔, 3,603원)과 우베(자주색 참마)와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블루 씰 초코 아이스크림 두 개(1개에 180엔, 1,965원)를 샀다. 슈퍼를 나와서는 아이스크림이 녹을까봐 얼른 먹었는데 무척 부드럽고 달달해서 정말 맛있었다. 여행 첫 날 저녁을 먹고 편의점에서도 블루 씰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부드럽고 적당히 달아서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과자는 해변으로 가져와서 물놀이 하면서 먹었는데 초코칩이 들어갔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해변으로 돌아와 오후 물놀이를 시작했다. 오전보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여유있고 한산했다. 물은 여전히 맑고 깨끗해서 바닷물에 몸을 담글 때마다 내 몸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엄마도 칠십 평생 이렇게 맑은 바닷물은 처음 본다고 연신 감탄을 하셨다. 나도 가이드북에서 볼 때는 이 정도까지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이 섬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같았던 어제의 식사와 숙소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한꺼번에 보상을 받는 느낌이 들만큼 정말정말 좋았다. 

 

나도 재미있게 한 번 놀아보자꾸나.

 

물놀이를 하다가 힘들면 나와서 돗자리 위에 누워 하늘도 한 번씩 쳐다보고 아까 슈퍼에서 사 온 과자도 먹으면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조금 지루해지면 물안경을 끼고 물에 들어가 해변까지 놀러온 작고 앙증맞은 물고기들도 구경하면서 오후 내내 유유자적 해수욕을 즐겼다. 힐링이 별건가. 이런게 바로 힐링이지. 

나는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라서 여름 휴가 때 남들 다 가는 해수욕장을 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물놀이를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면서 해수욕장에 놀러가 본 적이 단 두 번뿐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8살 때 외갓집 가족들과 대천 해수욕장에 놀러갔었고 또 한 번은 내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 가족들과 변산해수욕장에 놀러갔었다.

8살 때는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을 적어보자면, 그 때는 자가용 있는 집이 흔하지 않아서 대천 해수욕장에 갈 때 외갓집 근처에 있는 정류소에서 직행 버스를 타고 갔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외숙모가 버스에서 아이들끼리 먹으라고 투게더 통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그런데 버스에 타고 보니 이미 만원 버스여서 다들 서서 가야 했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먹을 수가 없어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해수욕장에 도착했는데 그 넓은 백사장에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어서 파라솔도 겨우겨우 하나를 구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른들이 해수욕장 근처 상점에서 수영복을 빌려주셔서 입었는데 조금 컸던 기억이 있고 어른들을 따라 튜브를 잡고 꽤 깊은 곳까지 따라 갔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해변으로 나와 주물러 주셨던 기억도 있다. 그 날 햇볕이 무척 따가워서 그랬는지 물놀이를 다녀오고 나서 얼굴과 팔, 다리가 까맣게 탄 건 물론이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팔과 등쪽 피부가 벗겨지기도 했다. 그 때는 선크림이 없던 시절이어서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뜨거운 땡볕 아래서 맨 살로 하루 종일 놀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지금도 그 때 튜브를 타고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무척 귀엽게 나와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진이 되었다.

두 번째로는 한 10여 년 전에 가족들과 변산 해수욕장으로 놀러갔었는데 해수욕장에 가서 먹을 음식까지 야심차게 준비하느라 대용량 아이스박스까지 마련했었다.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우선 싸 온 음식을 맛있게 먹고 물놀이를 하기 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물놀이를 위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은 생애 처음으로 수영복도 하나씩 마련했었다. 하지만 그 때에도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를 포함해 우리 가족들은 튜브를 타고 바닷물에 몇 번 들어갔다가 나오고는 그것으로 물놀이 끝!을 외치고 말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준비한 것들이 무색하리만큼 물놀이가 너무나 싱겁게 끝나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백사장에서 공놀이도 하고, 누워서 쉬기도 하고, 물에서 한참을 재미있게 놀기도 하는데 우리 가족은 물에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잘 몰라서 물놀이가 너무나 어색하고 어렵기만 했었다. 물놀이에는 특별한 공식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파라솔 하나 빌려서 물에도 들어갔다가 힘들면 나와서 파라솔 밑에 누워서 하늘 보면서 쉬기도 하고, 배고프면 간식도 냠냠 맛있게 먹고, 잠이 오면 단잠도 자고, 그렇게 한가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난다. 게다가 짐을 챙겨 올 때 어쩌다가 내 수영복 반바지를 빠트렸는지 집에 와서 보니 반바지가 없어서 처음 사서 한 번 입었던 반바지를 너무나 허무하게 보내고 다시 하나 샀던 기억은 덤이다. 그리고 그 때 야심차게 준비했던 아이스박스는 그 후로는 쓸 일이 없어서 시골집 창고에 고이 모셔두었다는 건 비밀이다.

그랬던 우리 모녀가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여유롭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앞으로도 종종 가족들과 계곡이든 해변이든 재미있게 물놀이를 즐기러 가야겠다.

 

한참을 놀고 있는데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져 둘러보니 구름이 많아지고 구름에 해가 가려졌다. 저멀리 해안선 근처에는 어두운 구름이 만들어져 하늘 위로 높이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설마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금방 구름이 걷히고 다시 밝은 모습의 바닷가로 돌아왔다. 원없이 놀고 쉬고 즐겼더니 벌써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 가이드북에서 아하렌 전망대가 있다는 것을 읽었었는데 정말로 해변 오른쪽 언덕 위에 팔각정 모양의 전망대가 있었다. 그래서 전망대도 한 번 올라가보기로 했다. 전망대에 가려면 바다를 바라보고 해변 오른쪽으로 쭈욱 걸어가 바위 사이로 난 구멍을 통과하여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언덕을 올라갈 때는 계단이 많아서 무릎이 좋지 않은 엄마는 조금 힘들어하셨다.

계단을 오르기가 좀 힘들기는 하지만 전망대에 오르면 힘들게 계단을 올라온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전망대 앞으로 탁 트인 아하렌 해변과 해변과 맞닿은 하늘, 그리고 해변을 감싸고 있는 산등성이까지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빛이 얼마나 투명한지 전망대에서도 물 속이 훤히 비쳐 무척 아름다웠다. 게다가 전망대 앞으로는 열대우림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어 우리가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 지상낙원이라도 와 있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전망대에서 아하렌 해변 반대쪽을 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런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동안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떠돌던 근심, 걱정들이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곳에서 일주일만 살면 복잡했던 머리와 몸이 깨끗하게 정리가 될 것 같다. 

전망대까지 야무지게 구경을 하고 나니 오늘 하루 원없이 즐겼다는 생각에 아쉬움 하나 없이 정말이지 만족스러웠다. 이제 곧 해도 질 것 같고 날도 어두워지니 슬슬 짐을 챙겨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숙소로 돌아와 우선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저녁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6시쯤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오는 순서대로 사장님이 직접 밥과 국, 반찬들이 1인분씩 놓인 쟁반을 가져다 주셨다. 어제 묵었던 숙소에서 너무나 실망을 많이 한 탓에 오늘도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쟁반에 놓인 음식들을 보는 순간 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곱 가지나 되는 반찬이 나온데다가 밥도 많이 나오고 내가 좋아하는 국도 많이 담아주셨다. 음식을 먹기도 전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감동, 그 자체였다. 눈으로 한 번 호강했으니 이제 맛을 한 번 볼까? 미소 된장국을 떠 먹어보니 넓적한 다시마 두어 장을 비롯해 건더기도 많고 국물도 육수를 내어서 끓였는지 깊고 감칠맛이 감돌았다. 반찬은 고야 찬푸르(여주 볶음), 생선회, 야채 샐러드, 모즈쿠(큰 실말, 길고 끈적한 해초), 고기 야채 볶음, 단호박찜, 단무지가 나왔는데 그야말로 반찬 하나하나를 정성을 담아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만큼 간이 적당하고 맛도 좋았으며 밥반찬으로 아주 훌륭했다. 물놀이를 하고 와서 그런지 배도 무척 고픈데다가 반찬도 맛이 좋아서 밥을 한 그릇 더 먹고 싶었다. 주방에 계신 사장님께 가서 한 그릇 더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니 흔쾌히 밥을 한 그릇 더 주셔서 남은 반찬과 함께 깨끗하게 비웠다. 어제의 빈약하고 맛이 없어서 실망스러웠던 식사를 보상이라도 받듯 오늘은 너무나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했다. 몇 년 전에 후쿠오카로 처음 일본 여행을 갔을 때 료칸에서 먹었던 가이세키 만큼이나 정성이 듬뿍 담긴 가정식을 여기서 또 먹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생각도 못했었는데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 보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는 그동안 밀렸던 빨래를 좀 해볼까 하고 세탁기가 있는 옥상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마침 세탁기가 돌고 있어서 좀 기다렸다가 빨래를 할 수 있었다. 땀과 먼지에 절은 묵은 빨래를 하고 나니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잘 빨아진 빨래를 들고 방으로 와서 옷걸이에 걸어 주욱 널어놓으니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시원하게 빨래를 다 널고는 오늘도 별을 한번 볼까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오키나와가 별 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도시를 벗어나 조금만 가도 어두운 곳이 많아 별 관측하기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는 대기가 맑기 때문인데 오염원이 없는 투명한 대기는 한낮의 파란 하늘뿐만 아니라 한밤의 선명하게 빛나는 별빛도 보장을 해준다고 한다. 그러니 오키나와까지 와서 별을 보지 않고 간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목이 아프도록 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정말로 행복했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알차고, 즐겁고, 맛있는 시간들로만 채워졌기 때문이다. 맑고 투명한 바다에서 하루종일 물놀이한 것도 즐거웠고, 마을의 작은 슈퍼를 구경하며 사먹은 아이스크림과 과자도 맛있었고, 식당에서 먹었던 점심과 숙소에서 먹었던 저녁도 훌륭했고, 밤에 보았던 반짝이는 별들도 가슴 시리게 아름다웠고, 깨끗하고 안락한 숙소의 방에서 잘 수 있는 것도 새삼 감사했고, 뭐 하나 어긋난 것이 없이 모두모두 좋은 날이었다. 

엄마는 지금도 그 때의 그 바다와 숙소에서 먹었던 정식 이야기를 가끔 하시곤 한다. 엄마 평생에 그렇게 맑고 깨끗한 바다에서 물놀이를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라고. 숙소에서 먹었던 음식도 정말 깔끔하고 맛있었다고. 그럼 나는 열심히 맞장구를 친다. 나도 엄마랑 똑같은 생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