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째>
2003년 7월 15일 화요일 날씨 : 맑음
강릉시 오죽헌 -> 양양군 죽도 해수욕장, 약 35km, 8시-7시
간밤에는 오랜만에 정말 깊게 잔 것 같다. 손님은 밤에 몇 명이 더 온것 같은데 그것도 모르고 조용해서 한번도 깨지 않고 7시까지 잘 잤다. 일어나니 새소리가 들린다. 산 속이라 공기도 맑고 새소리도 들리고 아침부터 괜히 기분이 좋다. 샤워하고 정리하고 하니까 8시쯤 되었다. 그 때쯤 찜질방을 나서서 여전히 인적이 없는 오솔길을 지나 나왔다.
경포대를 지나서 주문진쪽으로 향할 예정인데 가는 길에 선교장이라고 99칸인 사가가 있었다. 여전히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직원이 아직 출근을 안했나 보다. 문은 열려 있었다. 잠깐 들어가서 보고 있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아직 시간이 안 됐으니 나가서 기다렸다가 들어오라고 한다. 한쪽에는 공사중이라 포크레인과 트럭이 있고 99칸이라더니 그렇게 큰 것 같지도 않다. 다시 나와서 보니 직원이 출근해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보고 갈까 하고 직원한테
"저 학생인데 청소년표로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변.
"아침부터 와서 그러면 안되지. 여기 이렇게 써 있는데 글씨 읽을 만한 사람이 그럼 되나?"
그러는 것이다. 뭐? 아침부터 와서 그러면 안 된다고? 어디서 많이 들었던 멘트다. 장사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인데. 그냥 안 되면 안 된다고 하면 될 것이지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어?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안 봐도 별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나와 버렸다. 쳇! 아직 공사하는 중이면서. 분명 볼 것도 별로 없을 꺼야. 스스로를 위안하며 경포대를 향해 갔다.
우선 보이는 것은 경포호였다. 언제부터 바다였던 이곳이 호수로 변하게 되었을까. 인간이 알 지 못하는 사이 자연은 조금씩 조금씩 제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다. 원래는 둘레가 12km였는데 지금은 많이 메워져서 4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경포호 주변에는 아침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잠깐 앉아서 쉬고 있자니 참 평화롭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오리 한마리가 유유히 떠간다. 그래서 사진 한 장 찍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나도 경포호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행자는 뭐니뭐니해도 마음이 여유로워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잘 안 된다.
거기서 더 쉬고 싶었지만 오늘 갈 길이 멀기에 그냥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더 가니 말로만 듣던 경포대가 나온다. 옛 시선들이 술을 마시며 아름다운 경포 호수를 예찬하고 또 예찬했다던 그 곳. 올라가 보지 않을 수 없지. 역시나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다. 다가가서 보니 표 받는 젊은 아저씨가 인정이 많게 생기셨다. 한 번 얘기나 해 보자고 하면서 청소년표 끊어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물었다. 흔쾌히 허락. 기분이 일단 좋아졌다. 올라가는 길에 포크레인과 트럭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좀 그렇긴 했어도 말이다. 아까 선교장도 그러더니 여기도 역시 공사하는 중인가 보다.
사실 여기는 경포대 누각 밖에 볼거리는 없었다. 그리고 옛 시선들이 경포호를 예찬했던 시들이 적힌 34개의 비문들이 좀 볼만했는데 그 밖에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세웠다는 위령탑과 신사임당의 동상은 왜 거기에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신사임당의 동상은 오죽헌으로 옮겨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경포대에 오르니 경포호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역시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군. 참으로 시원하고 멋있고 여기서 술 마시면 정말 아름다운 시 하나쯤은 그 자리에서 뚝딱! 하고 나올 만도 하겠다. 특히 저녁에 바라보는 석양과 밤에 달이 비친 경포호의 모습은 가히 선경이라 한다. 여기서도 가이드 분을 만났다. 전직 교장이셨고 은퇴 후 여기서 가이드를 하시는 중이라 하신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신다. 그래서 부여라고 했더니 고향 사람이라 하신다. 알고 보니 부여와 가까운 논산이 고향이시다. 덕분에 설명도 잘 듣고 사진도 찍어 달라고 부탁드려서 사진도 찍고 좋은 시간 보냈다.
내려와서 경포 호수를 끼고 계속 걷자니 보이는 건 식당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내내 걷기만 했던 것이다. 경포호 끝자락까지 오니 점심 때가 다 되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비싼 회나 탕을 팔고 있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지나가다 김밥 아주머니 발견. 먹음직스러운 김밥 두 줄을 이천원에 사서 경포호를 바라보며 천천히(?)가 아니 허겁지겁 먹었다. 김밥 맛은 지금까지 편의점에서 사먹던 천원짜리 김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 살 걸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싸고 맛있었다. 그렇게 해서 아침 겸 점심 해결.
경포호는 경포대 해수욕장과 거의 붙어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경포호를 지나니 바로 경포대 해수욕장이 나왔다. 아직 휴가철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잠깐 구경하러 들어갔었는데 백사장도 넓고 물은 그야말로 맑고 푸른 환상의 바다 빛깔이었다. 역시나 무거운 배낭에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피서를 온다면 동해안으로 오고 싶어졌다. 서해안도 좋지만 동해안은 정말 매력적인 곳인 것 같다. 푸르고 맑은 바다, 잊지 못할 것이다.
난 바다에 대해 막연한 환상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그랬지. 바다에는 자유가 있다고. 바다는 대지의 끄트머리까지 밀려난 인간이 마지막으로 자유를 느끼는 곳이라고.
바다에는 자유가 있다는 말, 조금은 알 것 같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는 수평선을 보고 있노라면 차분하게 생각이 정리되고 일상에서 느꼈던 괴로움 같은 것들 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또다시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하고. 도보 여행이란게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다고 해도 이런 순간 만큼은 너무나 행복하다. 행복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좋다.
경포대를 지나 주문진까지는 7번 국도가 아닌 해안도로로 걷는다. 이왕이면 4차선 먼지나는 도로보다는 바다를 보면서 걷는 것이 좋겠지. 바람도 적당히 불고 구름이 껴서 그렇게 덥지도 않고 내 옆으로는 몇 만평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야말로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다. 바다는 역시 보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너무 좋다.
주문진은 제법 큰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건어물 상가도 도로를 중심으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쭈-욱 이어져 있었다. 이렇게 큰 건어물 상가는 처음이다. 강원도에서도 주문진 오징어을 알아 준다고 그러던데 정말 그럴만도 했다. 항구와 시장을 구경하고 점심 겸 저녁으로 중국집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큰 마트가 보이길래 내일 아침으로 먹을 간식거리도 조금 샀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 주문진을 지나고 나서는 다시 7번 국도로 걷는다. 지나는 곳마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도 모두 해수욕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경포대 같은 큰 해수욕장이나 이런 작은 해수욕장이나 모두 좋아보인다. 어쩌면 이런 작고 조용한 해수욕장이 놀기에는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 시끄럽지도 않고.
인터넷 자료에서 본 바로는 죽도 해수욕장에 가면 찜질방이 있다. 나도 오늘 거기까지 걷기로 한다. 역시나 4차선 국도, 차들이 쌩쌩. 무서워라. 그래도 꿋꿋이 갔다.
죽도 해수욕장이 가까워 온다. 정말 그 찜질방이 있을까. 산 모퉁이를 돌아서니 정말 다행히도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오늘도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 근데 정말 비싸다. 관광지라 그런가 8000원이나 했다. 지금까지 가본 곳 중에서 가장 비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여기 아니면 잘 곳이 없으니까. 오늘도 참 피곤한 하루였다. 중간에 제대로 앉아서 쉬지도 않고 11시간 정도를 걸었다. 발이 많이 아프다. 그래도 이렇게 머무를 곳이 있다는게 정말 감사했다. 창문을 통해 보니 파도가 소리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또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그렇게 있은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이 여행도 얼마 남지 않았다. 끝까지 아무 탈없이 무사히 여행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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