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 읍성의 정겨운 골목
<6일째>
2003년 6월 25일 수요일 날씨 : 맑음
보성군 벌교읍 -> 낙안 읍성 -> 순천시
어제는 할 수 없이 벌교역에서 밤을 샜다. 정말 서러웠다. 집에 가고 싶었다. 내 조그만 자취방이 왜 그리도 그리운지 모르겠다. 앞으로 두 다리 뻗고 잘 곳만 있다면 뭐든지 하리라. 정말 감사해 하며 살리라. 별교는 실망이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라고 하길래 예전부터 와 보고 싶었는데 별로인 것 같다. 아니, 별로이다. 다만 어제 역에서 직원 아저씨께 역에서 하룻밤 자고 가면 안되냐고 하니까 그러라면서 걱정해 주신 것 빼고는. 그래서 더 눈물났지만. 여행 오니까 하룻밤, 하룻밤이 정말 너무 소중하다.
오늘은 조정래 생가와 낙안읍성 갔다가 다리 아프면 중간에 차타고 순천가서 내일 다시 와서 걸어야겠다. 벌교, 빨리 벗어나고 싶다. 지금은 편의점에서 아침으로 라면이랑 김밥먹고 있는 중이다. 근데 별로 못먹겠다. 맛이 별로 없다.
어제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속도를 못내서 그런지 늦게 벌교에 도착했다. 걸은 시간이 거의 10시간이나 되었다. 핸드폰이 꺼져서 시간도 모르고 마냥 걸었던 것 같다. 오늘은 여행 6일째이다. 하루나 버틸까 했는데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왔다. 어디까지 갈지는 지금으로서는 장담 못하겠다. 중국에서처럼 '이젠 정말 가야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찰 때가 되면 그때가 내가 돌아가야 할 때이다. 통일 전망대까지는 못하더라고 남원까지는 가고 싶다. 근데 발이 정말 아프다. 왼발은 물집 때문에 내가 생각해도 안쓰럽다. 주인 잘 못 만나 고생이다.
A급 무전 여행하는 사람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난 돈 가지고 다니면서 해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돈 없이 여행을 하면서 다닐까. 아! 정말 존경스러워. 텐트 좋긴 한데 무거워서 못 가지고 다닌당께. 오늘도 날씨는 흐릴 모양이다. 어젯밤에는 어찌나 춥던지 중간에 우비 덥고 잤다. 역의 의자도 너무 불편하고. 정말 잠 잘 곳만 있다면 뭐든지 하리라. 정말이다.
열심히 열심히 걸었다. 근데 조정래 생가 가보려고 했더니 표지판조차 없고 사람들한테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결국 못 찾고 바로 낙안으로 왔다. 소화다리, 홍교도 있다는데 역시 설명이 없다. 벌교는 마지막까지 실망만 주는군.
낙안까지는 7km이다. 2시간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근데 대체 읍성이 어디있을까 싶게 아무것도 안 보인다.
뒤에 산밖에 없다. 그래도 오늘은 볼거리를 찾아간다고 생각하니 힘이 난다. 돌아 돌아 드디어 도착. 숨어 있다가 마치 거짓말처럼 짜잔~하고 나타난다. 꽤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 마을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읍성이라고 한다. 서산에 해미읍성도 있는데 한번 가봐야겠다. 객사, 동헌 등은 기와집이고 일반 사람들이 사는 집들은 지금도 모두 초가집이다. 성 위로 올라가서 보니 꼭 거대한 버섯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곳이 있다니.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고등학생들이 떼로 몰려왔다가 30분도 안 되어서 썰물 빠지듯 사라진다.
삼베 짜는 할머니, 서당과 훈장님, 짚신 짜는 할아버지도 만나 뵙고 사진도 찍고 좋은 시간 보냈다. 정말 멋있는 골목(순전히 내 생각)도 찍고 30분 가까이 기다려 골목에서 나도 사진 찍었다. 이럴 땐 여행할 맛 난다. 마치 어제 일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동헌에서는 전직 중학교 교장하시다 은퇴하시고 가이드로 계시는 분을 우연히 만나 동헌 구조에 대해서도 듣고 동헌 간판(사무헌)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었다. 재판이 없는 관청이라는 뜻이라는데 낙안이란 이름과 아주 잘 어울린다.
우체국 있길래 처음으로 메일 확인도 하고 친구들에게 메일도 보냈다. 꼬마들이 기다리고 있어 빨리 나와야 했지만 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순천시를 향해 걷기 시작.
허걱~ 근데 장난 아닌 오르막 길이다. 산세는 아주 뛰어났는데 산속에(첩첩산중) 길이 있어 무서웠다. 솔직히. 운 좋게도 중간에 트럭 아저씨께서 태워주신다. 오늘은 거절할 기운이 없다. 아니, 용기가 없다. 어제 역에서 불편하게 자서 나에게 어서 휴식을 주어야 했다. 순천까지는 차를 타고도 엄청 먼 거리였다. 순천에 도착해서 느긋하게 밥먹고 찜질방 들어왔다. TV보다가 이제 일기쓰고 자야지.
내일은 하동으로. 순천 오는 길은 다시 안 걷는다. 아니 못 걷겠다. 이것도 경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절대 핑계군.)
맘 편히 생각해야지.
잠 잘 곳이 있다는 거 정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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