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한 걸음의 의미-도보여행(2003)

나홀로 국토 종단 도보 여행기(5) 장흥군-보성군

anna325 2007. 1. 19. 13:31

 

대한 다업. 손가락을 대면 녹색 물이 주르륵 묻어날 것만 같다.


<4일째>
2003년 6월 23일 월요일 날씨 : 비
장흥군 -> 보성군 -> 보성군 대한 다업 차밭, 약 30km, 5시 50분-17시 30분

어제 저녁을 먹고 밖에 나와서 기념으로 그 댁 사진도 찍고 하려는데 세 딸 중 큰 딸 다혜(초등학교 3학년), 둘째 딸 다운(초등학교 1학년)이가 따라 나온다. (막내는 다빈이 2살) 아까부터 궁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이다.
말을 걸까, 말까.
얘기 해보니 말도 잘하고 순진하다. 나도 초등학교 때는 저랬을까. 그리고 정말 예쁘게 생겼다. 특히 다혜. 짧은 시간에 많이 친해졌다. 아주머니는 그 사이 이불까지 펴놓으셨다. 아이구, 감사해라.

오늘 아침에는 5시쯤에 눈을 떴다. 할머니께서 아침을 준비하시는 소리가 난다. 죄송하고 미안해서 아침은 도저히 못 먹겠다. 먹고는 싶지만.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감사하다는 인사만 드리고 나왔다.
비가 온다. 오늘부터 장마 시작이란다. 이런--;;

어제 많이 쉬어서 힘이 날 줄 알았는데 발바닥은 여전히 아프다. 그래도 나는 간다. 근데 오늘은 유난히 덤프트럭을 비롯한 트럭들이 많이 지나간다. 우산은 물론 온몸이 흔들흔들. 바지는 2시간 정도 되니 다 젖었고 신발은 그 전에 젖었다. 우비. 일회용 우비를 꺼내서 입었다. 그래도 별로 소용없다. 근데 버스나 엄청 큰 트럭이 추월을 하는 바람에 정말 놀랐다. 내 바로 옆에서! 정말 맘 착하게 먹으려 해도 이런 사람들 땜에 안된다니까.

오늘 걸을 거리는 장흥-보성 구간 약 23km에 보성에서 대한 다업 차밭까지 7km정도 된다. 비오니까 정말 더 힘들다. 근데 한 덤프트럭이 길가에 선다. 물론 반대편 차선에서. 타라고 하는 거 같다. 빗소리 땜에 잘 들리진 않았어도. 타진 않았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드디어 보성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강진만큼 구불구불하진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보아하니 읍내 분위기가 어제 장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우선 밥 먹으러 분식집에 들어가서 칼국수를 먹었다. 2500원인데 바지락도 들어가고 맛있었다. 주인 아줌마는 좀 불친절했지만서두. 파출소 찾아가서 정보 좀 얻어야겠다. 역전 주변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봤더니 역 참 잘 지어 놓았다. '맞이방' 이 단어 정말 예쁜 것 같다.

역 바로 앞에 파출소가 있어서 물었더니 하나 있긴한데 24시간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전화번호 좀 알려 달라고 했더니 감사하게도 직접 전화를 걸어 주신다. 24시간 한다고 한다. 휴~ 다행이다. 시간도 오후 1시 좀 넘었고 이제 잘 곳도 있으니 느긋하게 차밭 보러 가야지. 7km 정도 된다. 가는 길에 정류장에 할머니가 계시길래
"할머니, 여기가 차밭 가는 길 맞아요?"
라고 여쭈었더니
"맞긴 헌디 걸어갈라고? 20리길이여. 8km. 여그서 차타먼 휑허니 가는디. 차삮도 750원 밖에 안 허고."
그러신다.
"예. 근데 저는 걸어서 여행 중이거든요."
"거 참. 모할라구 사서 고생이랴."

참 재밌다. 만나는 분들의 이런 반응들도 여행의 한 즐거움이다. 근데 가면 갈수록 비가 그치고 안개가 내려온다.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 1m정도 밖에 안보인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헛걸음하는 거 아냐? 여기 내 평생 다시 올지 장담 못하는데 아까 버스타고 가라는 말 들을 걸 그랬나? 가는 내내 이 생각밖에 없었다. '안개야, 제발 걷혀라. 걷혀라.'

TV에 자주 나온다던 '대한 다업'에 드디어 도착했다. 이 근처에 다원이 많아서 다른데로 들어갈 뻔했다. 근데 안개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입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옆에 매점 아저씨한테 여쭈어 보았다.
"쭉 올라가먼 돼요. 5분도 안 걸려요." 
조금 올라가다 또 헤매다 옆에 찻집인지 아무튼 거기서 물어서 겨우 차밭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예상대로 안개 때문에 바로 앞 몇 줄만 보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도 걸어서. 체념하고 안개싸인 차밭이라도 찍으려고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서서 보는데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랬던 것이었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 도착한지 5분만에. 이 무슨 신의 은총이냐.
바람에 안개가 걷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런 선경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산 한면에 모두 차밭을 만들었는데 그 전경이 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발이 언제 아팠냐는 듯 그 순간만큼은 정말 좋았다. 행복했다. 이곳 저곳 찾아다니며 사진도 엄청 많이 찍었더랬다. 오늘 차가 튀기고 가는 물 고스란히 맞으며 여기까지 온 보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순간만큼은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관람(?)을 끝내고 내려오니 도저히 다시 걸어갈 순 없고 여기까지는 걸어왔으니 다시 돌아가는 건 차타도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버스를 탔다. 근데 5분 만에 오는 것이었다. 내가 2시간 걸어온 길을. 역시 차가 좋긴 좋다.

터미널이 종점이라 거기서 내려서 터미널 옆에서 500원 짜리 빵을 하나 사고 약국가서 파스도 하나 사고 찜질방으로 왔다. 찜질방은 터미널과 그리 멀지 않았다. 우선 가방의 짐들을 분해해서 정리하고 씻고 몸무게 재보니 며칠 사이에 살이 많이 빠졌다. 이런! 중학교 이후로 이렇게 몸무게 적게 나가긴 처음이다. 가방 무게는 약 5kg이었다. 누구는 11kg이었다는데 그에 비하면 양호하다. 근데 찜질방에 사람이 없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올까 했는데 밤새도록 아무도 안 왔다. 결국 찜질방도 나 혼자 쓰고 수면실도 나 혼자 썼다. 완전히 전세냈다.

지금은 24일 아침이다. 역시 5시에 눈이 떠진다. 이불도 없이 베개도 없이 잠을 자서 그런지 일찍 눈이 떠진다. 이제 씻고 짐 정리해서 떠나야지. 나그네 인생.

그리고 어제 물집이 두 개나 잡혀서 엄청 고생했는데 실 끼워놨더니 아침에 보니까 말끔히 가라앉았다.
참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오늘은 별교를 향해. Figh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