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째>
2003년 7월 8일 화요일 날씨 : 흐림
단양군-영월군, 약 36km, 8시-5시(약 9시간)
물가마에서 어제는 쉬는 날이라 못했던 물가마 체험을 하고 휴게실로 올라가니 사람이 없다. 저쪽에서 아저시 한 분만 주무시고 계신 듯 하다. 그래서 TV소리 작게 하고 11시까지 '옥탑방 고양이'를 재미있게 보고 잤다. 정은이가 불쌍하다. 꼭 나처럼. 아니, 닮고 싶다. 성실한 사람 맘에 들어.
아침에 6시 50분 단양으로 가는 첫 차를 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다행히 5시 30분에 눈이 떠진다. 좀 누워 있다가 6시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옷 입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왔다. 주인 할머니께는 잘 쉬었다 간다고 인사드리고 나왔다.
새벽 공기는 여전히 좋다. 좀 있으니까 단양가는 버스가 왔다. 내가 어제 장장 2시간 걸려서 걸어 온 길을 차를 타니 10분도 안 되어 도착한다. 시내에서 내려서 파출소라도 가서 길을 묻고 싶었는데 영 못 찾겠다. 주위를 살펴보니 편의점이 있어서 핸드폰 충전하고(또 건전지가 2개 밖에 안 뜬다.)멋지게 생긴 다리를 건너서 영월로 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처음부터 고개다. 갓길도 별로 없다. 무섭다. 근데 꼭대기에서 내려가는데 남한강과 산들이 정말 멋있다. 구불구불 남한강. 강에서는 낚시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강가 주변에는 민박집이며 가든이 즐비하다. 점심 때가 되어서 나도 한 가든에 가서 순두부 찌개를 먹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정식이냐! 넘 맛있어서 반찬도 하나 남김없이 다 먹었다.
든든하게 먹고 다시 출발했다. 근데 갈림길이 나온다. 지름길이 비포장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계시던 아저씨들께 여쭈어 보니 그 길로 가면 위험하다고 하신다. 산을 하나 넘어야 해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 혼자 가기에는 위험하다고 지방도로로 가라고 하신다.
"여행 혼자 왔어요? 여자 혼자 어떻게 여행해요? 내가 차 태워줄테니 갈래요?"
"아.. 아니에요. 저는 걸어서만 가거든요. 알겠습니다. 이 쪽으로 가면 가장 빠른 길이라구요. 감사합니다."
하고선 길을 들어서는데 허걱! 공사 중이라 비포장 도로에다가 덤프트럭이 왔다갔다 하고, 먼지가 자욱하고, 정말 최악이었다. 하지만 내 옆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강원도답게 보기에도 웅장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도로 공사하는 구간이 많다. 비가 오지 않고 맑은 날이라서 먼지가 장난이 아니었다.
근데 지나가다가 도보 여행자를 만났다. 그동안 자전거, 도보 여행하는 분들 몇 번 만났는데 참 반갑다. 2명이었다. 모두 남자들이었는데 그 쪽에서 먼저
"수고하십니다."
한다. 그래서 나도
"아, 예.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시는 거에요?"
"땅끝이요."
"얼마나 걸리셨어요?"
"오늘이 19일째예요."
"정말 빨리 오셨네요."
"어디서 오시는데요?"
"통일전망대요."
"며칠 걸리셨어요?"
"12일이요."
"네."
'통일전망대에서 12일 걸렸다고? 나도 정동진까지만 가는게 아니라 통일전망대까지 가볼까? 정말로 일생에 한 번 하는 건데 끝까지 정말 한 번 해 봐?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가고 있는데 저기 같은 일행인 듯 3명의 남자분들이 오고 있었다. 텐트까지 가지고 다니는지 배낭이 엄청 컸다. 나도 도보여행하고 있지만 저 정도 짐이면 정말 무거울 것 같다.
드디어 나의 도보 여행 마지막 '도'인 강원도에 입성했다. 충청북도는 'Good-bye, please come again.'이라는 표어로 온달 왕자와 평강공주가 앙증맞게 웃고 있다. 그래서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도 경계에 쉼터가 있길래 앉아서 쉬고 있자니 남한강에서 래프팅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래프팅은 안 해 봤지만 재미있겠다. 나도 나중에 한 번 해봐야지. 꼭!
잠깐 쉬고 내려가다가는 말로만 들었던 줄배를 보았다. 줄배에 차를 싣고 와서 이쪽에 내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놓칠세라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러면서 열심히 가니 다리를 지나 고씨 동굴로 가는 다리가 보였다. 고수 동굴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고씨 동굴은 지도에 나와 있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매표소가 보인다. 근데 허걱! 청소년과 군인도 1,800원이나 하고 물어보니 대학생은 일반표를 끊어야 한단다. 너무 비싸다. 이거 나라에서 관리하는 거 맞나? 아닌 것 같다. 근데 여기에 엄청난 인연이 숨어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여행하는 동안 가장 고마운 인연이 될 듯 싶다. 정말로.
표를 끊기 전에 여기 직원인 듯한 아저씨에게
"너무 비싸요. 저 무전 여행(도보 여행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하는 학생인데 무료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여자분은 무료로 해주셨잖아요."
여자분 둘이 오셔서 한 분만 표를 끊고 들어가시자 남은 한 분께 같이 들어가라며 무료표를 끊어 주시는 걸 보았던 것이다.
"그건 아무나 주는 게 아니고 오늘이 강원도민의 날이에요. 근데 걸어왔어요?"
"네."
"어디서요?"
"땅끝이요."
그런데 아저씨는 땅끝이 어딘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일반표를 끊어야 한다는 걸 우겨서 겨우 1,800원짜리 청소년 표를 끊어 들어가게 되었다.
산이 정말 큰데 동굴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밖에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 때가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6시에 문을 닫으니까 빨리 보고 오라는데 끝날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너무 조용하다. 순간 갑자기 무서워졌다. 갑자기 동굴 속 모습이 징그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나왔다. 마침 한 여자분이 오시길래 같이 들어갔다.
고씨 동굴의 이름은 임진왜란 때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의병을 만들어 싸우다가 이곳으로 피해서 고씨 일가가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 직원 아저씨가 사람들이 다 나갔는지 확인하러 오셨다가 우리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 운 좋게도 동굴 여기 저기 보면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나가는 손님이 되었다. 역시 오길 잘했군. 내가 영월까지 걸어간다고 하니까 직원차를 타고 가라고 하신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고 나와서 사무실에서 아까 맡겨 두었던 짐을 챙겨서 나오려고 하니까 동굴에서 설명해 주셨던 아저씨가 같이 따라 들어오시며
"이제 영월로 가요? 영월 여기서 먼데..."
"한 15km 되지 않나요?"
"한 13km 정도 돼요."
"한 세 시간이면 가겠죠."
"내가 태워다 줄테니 갈래요?"
"저 차 타면 안 돼요."
"왜, 누구랑 약속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럼 자신과의 약속?"
"예."
그러시면서 고백을 하신다. 내가 동굴을 구경하러 간 사이 지도를 잠깐 보셨다고 한다.
"내가 잠깐 지도를 봤는데 온 길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면서 왔데요. 정말 걸어서 왔어요?"
"아, 그러셨어요? 그럼요. 걸어서 왔어요."
"며칠 걸렸는데요?"
"오늘이 19일째에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시면서 아까 돈을 안 받아야 하는데 받았다면서 만원을 주신다. 순간 당황한 나. 뒤로 물러서면서 괜찮다고 사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내가 이 돈을 받아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도 6시가 넘고 해서 영월에 걸어서 가면 9시가 넘을 것 같아 결국 아저씨의 차를 타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나중에 돈이 모자라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하신다. 말씀만이라도 얼마나 감사했던지. 근데 더 결정적인 것은 괜찮으면 집에서 재워주시겠단다. 그동안 얼굴이 엄청 두꺼워진 나. 그러시면 감사하다고 했지. 영월에서 또 민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집에 전화하신다. 정말 감사하다.부인께서는 엄청 젊으셨고 예뻤다. 아이들은 아홉 살 아들과 일곱 살 딸이 있었다. 딸은 정말 예쁘게 생겼다. 하긴 부모님 두 분 다 수려한 용모셔서 당연한 결과.
오랜만에 밥도 맛있게 먹고, 인터넷도 하고, 아저씨는 핸드폰까지 빌려주신다. 집에 연락하라시면서. 밤에는 지도 보고 어디로 가야 빠른지 설명도 해주시고. 그래서 평창으로 해서 정선으로 가기로 했다. 뭐 필요한 거 없냐고도 물어보시고 내일 장릉에 데려다 주신다고 한다. 그리고 우비도 하나 주시겠다고.
정말 너무 감사하다. 감사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내가 이런 도움을 받아도 되는 걸까? 정말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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