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중국(2016)

베이징 여행기(2일차, 2016.8.2.화)-천안문, 자금성

anna325 2017. 11. 20. 21:36

(이 글에서 설명은 '프렌즈 베이징-전명윤, 김영남'을 참고하여 썼다.)

 

오늘 아침은 숙소 맞은편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서 만둣국(5위엔, 약 890원)을 먹으면서 시작한다. 고수를 넣어서 좀 맛이 독특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뜨끈하게 배를 채우고 지하철을 타러 덩스커우 역으로 갔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숙소에서 지하철 역까지 걸어서 20~30분 걸리는 것이 함정. 톈안먼둥 역에서 내렸다. 천안문 광장에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이미 만원이었다. 중국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어딜 가나 외국인 관광객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더 많았다.

 

 

13년만에 다시 보는 천안문. 건물도 그대로, 국기도 그대로다. 13년 전 겨울, 저녁 5시에 국기 하강식을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원래 이 일대는 베이징 내성과 황제의 궁전인 자금성 사이에 있는 일종의 궁정 광장이었다고 한다. 궁전의 정문이 천안문. 우리나라의 광화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천안문이 처음 건설된 것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명 영락제 때인 1471년이라고 한다. 원래는 '승천문'이었는데 17세기 명나라가 멸망한 후, 청의 순치제에 의해 재건되어 이름을 '천안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천안문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입구가 5개인데 각각의 문의 용도가 다르다고 한다. 가운데 가장 큰 문은 황제의 전용문인데 예외로 황제의 부모님이 들고 날 때, 황후가 시집을 올 때, 과거 급제자 1, 2, 3등이 처음 입궐할 때 한 차례씩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이 규칙은 궁전의 다른 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한다.

 

 

 

 

 

천안문을 보고 자금성으로 이동하였다. 중국의 특징은 관광지나, 거리나, 맛집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어딜 가나 사람이 많다는 것, 그리고 관광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넓고 크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원, 명, 청으로 이어지는 800여년 간 동아시아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천자의 거처이며 청대까지 중국 정치의 1번지가 이곳 자금성이다. 자금성이 세워진 것은 1420년. 명 영락제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인데 이 일대에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 때인 1267년에 이미 궁전이 있었다고 한다. 원의 수도였던 대도의 황궁터가 현재 자금성과 50% 가량 겹친다고.

 

자금성은 신해혁명 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프랑스의 루브르 궁전을 박물관으로 꾸민 것처럼 이 곳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화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에 의해 다시 철거될 위기에 처했는데 저우언라이에 의해 백지화되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박물관이 되었다고 하니 자금성의 생도 참 파란만장하다. 

 

매표소에서 40위엔(약 7,120원)을 주고 한국어 오디오 기계를 빌렸는데 별로 유용하지 않았다. 사용법도 잘 모르겠고 주위가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올 일이 있으면 그땐 빌리지 말아야 겠다.

 

위 사진은 태화전.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자 중국 궁전 건축의 자랑스러운 금자탑이라고 칭송받는다. 외조의 첫 번째 건물로 황제의 공식 행사, 즉 황제의 즉위식, 매 10년마다 거행되는 황제의 탄생 축하행사, 황제가 직접 발표하는 조서 반포, 과거 급제자 발표, 동지와 원단(음력 정월 초하루)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3단의 테라스는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최상의 높이라고 한다. 테라스를 장식하고 있는 1488개의 기둥과 1142개의 용머리 배수구도 멋지다.

 

 

궁전 사람들이 보던 해시계

 

 

비가 오면 물이 나가는 배수로인데 용의 머리가 너무나 일정하여 통일미를 선사한다.

 

 

중화전으로 올라가는 길. 3단의 테라스와 용머리 배수구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중화전(우), 보화전(좌)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대부분 중국인이다.

 

 

중화전. 19세기 변법자강 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광서제가 서태후에게 유폐된 곳이라 한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의문사한 광서제는 중화전과 이화원의 옥란당을 전전하며 10년간이나 유폐 생활을 했다고 한다.

 

 

보화전 지붕 아래에서 잠시 쉬었다.

 

 

중화전의 내부

 

 

보화전. 1420년 최초로 건립되었다가 1년 후 불이 나 전소되어 1441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궁궐에도 있는 이것의 용도는? 바로 소방수를 담아 놓는 거대한 항아리이다. 불이 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고 한다.

 

 

 

 

 

 

 

 

중화전

 

 

 

 

 

 

보화전 뒷편으로 돌아가면 바로 길이 16.75m의 거대한 운룡대석조가 나온다. 황제가 가마를 타고 지나가던 계단이라고 한다. 무게가 200톤인데 더 놀라운 것은 이 계단이 지금보다 3배나 더 큰 원석을 그대로 운반해 조각내지 않고 통으로 조각했다는 것이다. 원석을 발견한 때가 여름철이었는데 원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운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매 4km마다 우물을 판 뒤 겨울이 왔을 때 우물물을 길어 바닥에 뿌렸다. 채석장인 팡산에서 베이징까지 약 50km에 달하는 얼음도로가 생겼고 장정 2만명이 투입되어 28일 동안 운반하여 베이징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시 중국은 뭐든지 스케일이 다르다. 

 

 

벽의 아름다운 문양

 

 

건청궁의 내부. 내정의 핵심 건물로 청나라 초기 황제들의 침전이자 집무실이었다. 또 황제가 죽으면 장례식 때까지 시신을 여기에 안치했다고 한다. 18세기 초, 청의 옹정제 이전까지만 해도 건청궁에는 27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이는 암살자가 건청궁에 침입한다 해도 어느 침대에서 황제가 자는지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후에는 비밀침소인 양심전을 만들어 이런 위협을 줄일 수 있었다고.

 

건청궁 최대의 볼거리는 '정대광명'이라 써 있는 편액이라 한다.  순치제의 친필인데 옹정제 이후 황제들은 이 편액 뒤에 황위를 이을 왕자의 이름을 써서 숨겨두었다고 한다. 이른바 밀건법이라는 제도인데 황제의 사후 왕자들의 황위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황제는 생전에 후계자 지정 문서를 2부 작성해 1부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사망한 후, 편액과 황제의 몸에 있던 문서를 꺼내 동일한 인물이 적혀 있으면 그가 황위를 이었다고 한다.

 

 

 

 

자금성 밖에서 본 해자. 옛 궁궐이나 성 주변에는 대부분 이렇게 해자가 있다. 적이 침입했을 때 쉽게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이다.

 

자금성은 너무 넓고 건물도 많아서 마치 미로같다. 결국에는 다 보지 못하고 체력이 급하락하여 후반부에는 대충 둘러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옛 황제들도 아마 평생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있지 않을까?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들어간 골목 식당. 다행히 메뉴판에 사진이 있어서 심혈을 기울여 음식을 골랐다. 돼지고기 요리, 마파두부, 밥을 시켰다. 돼기고기 요리는 먹을만 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시킨 마파두부는 엑! 무슨 화장품같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먹기 어려운 맛이 났다. 돈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이 밥에 돼기고기 반찬만 얹어 먹었다. 그리고 물을 달라고 했더니 뿌옇게 무언가 가라앉은 뜨거운 물을 유리잔에 부어 갖다 주었다. 그 후로 우리는 식당에서 물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중국은 물에 석회암이 섞여 있어 물이 뿌옇다고 한다. 집 떠나면 생수를 사 먹는 것이 정답이다.

 

 

날도 더운데 많이 걸었더니 너무 피곤해서 오후에는 숙소에서 낮잠을 잤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대동카오야'로 이동. 걸어가면 20~30분 정도 걸릴 거리여서 오토바이 택시(?)를 20위엔(약 3,560원) 주고 타고 갔다. 아주머니께서 불법 좌회전을 하시면서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주신 덕분에 약 5분 후 대동카오야에 무사히 도착했다. 여기는 차나 사람이나 그 외의 어떠한 교통수단들도 교통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다. 신호등이 초록불이 되어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에는 언제 어느 때 차가 지나갈지 모르니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지나가야 한다.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

 

 

겉으로 보기에도 고급 레스토랑의 모습이다.

 

 

밀전병에 싸서 먹을 채소와 소스. 이 접시 하나가 1인분으로 12위엔(약 2,136원)이다.

 

 

정갈한 수저

 

 

 

 

우리는 카오야 1마리(288위엔, 약 51,264원)를 시켰는데 카오야를 시키면 이렇게 테이블로 와서 직접 썰어 준다. 그런데 3명이 먹기에는 양이 너무 적어서 아쉬웠다.

 

베이징카오야는 원래 궁정 요리의 한 종류였는데, 청나라 몰락 시기 비법이 민간에게 공개되어 베이징의 대표 요리로 떠올랐다고 한다. 카오야용 오리는 작은 상자에 넣어 운동량을 최소화시켜 요리한다고 한다. 이른바 인공 비만을 만드는 것. 이렇게 100일가량 키운 오리만 이용한다는데 알고 나니 오리가 좀 불쌍하기도 하였다. 

 

 

 

 

 

 

각종 채소와 소스를 넣고 밀전병에 싸서 먹기도 하고,

 

 

설탕을 발라서 먹기도 한다. 양이 생각보다 너무 적어서 맛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13년 전 배낭여행할 때는 뒷골목 허름한 식당에서 먹었는데 양도 많고 정말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먹어보려 한 건데.. 다음에 갈 때는 뒷골목 허름한 식당으로 가야 하나?

 

 

마지막으로 나왔던 사골국 같은 맛의 뽀얀 국물. 지금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올 때는 걸어서 돌아왔다. 해가 어스름하게 지고 있어 한낮의 열기가 한층 꺾인 느낌이었다. 거리에는 오고가는 사람들도 많고, 도로에는 퇴근하는 차들도 많고. 천천히 구경하며 걸었다.

오후에 쉬어서 그런지 그다지 피곤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