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중국(2016)

베이징 여행기(3일차, 2016.8.3.수)-이화원

anna325 2017. 12. 4. 22:04

 (이 글에서 설명은 '프렌즈 베이징-전명윤, 김영남'을 참고하여 썼다.)

 

오늘도 어제 아침을 먹은 숙소 맞은편 작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어제는 국수를 먹었는데 오늘은 만두와 튀김 종류를 먹어 보았다. '만두의 나라'답게 정말 맛있었다.

 

 

군만두, 고기만두, 찐빵만두(?) 등 만두를 3판이나 시켜서 먹었다는.. 저 찐빵만두가 북경식 고기만두인 빠오쯔가 아닌가 생각한다. 모양이 비슷하다.

 

 

찐빵만두(한 판에 8위엔, 약 1,424원)

 

 

고기만두(한 판에 8위엔), 우리나라 만두와 모양이 비슷하다.

 

 

군만두(1개 2위엔, 약 356원), 고기와 야채가 들어가 맛있었다.

 

 

꽈배기 모양의 튀김(1개에 2위엔), 맛이 잘 생각이 안 난다.

모두 합쳐 28위엔(약 4,984원)으로 배부르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룰루랄라 이화원을 찾아 길을 떠났다.

이화원도 대학교 배낭여행할 때 와 보았던 곳이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먼저 지하철 둥쓰역에서 베이궁먼 역으로 가면 도보로 5분 거리에 이화원의 북궁문이 나온다. 들어갈 때는 북궁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동궁문으로 나왔다. 이화원 입장료는 60위엔(약 10,680원)이었다.  

 

제일 먼저 지나간 곳은 쑤저우제였다. 이 곳은 쑤저우 운하를 본 따 인공을 만든 운하이다.

 

 

쑤저우제는 강남의 쑤저우를 본 떠 만든 거리로 1751년 건륭제의 기획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건륭제는 운하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유명한 곡창지대로 사치스런 문화가 발달한 쑤저우의 모습에 반해 재위기간 동안 쑤저우를 3번이나 방문하였고 그것으로 모자라 이화원에 쑤저우의 저잣거리를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게 했다고 한다. 황제들은 이 저잣거리에서 행인 행색을 하며 물건을 사고 값을 깎으며 서민들의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이화원에서 유일하게 상업 시설이 들어온 곳이라 하는데 식당도 있고 찻집도 있지만 대부분 옆집과 똑같은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전부여서 별로 재미는 없었다.

 

 

쑤저우제를 지나자 넓은 광장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체조같은 걸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너무 덥고 습해서 우리는 이 곳에서 잠시 앉아 쉬면서 이 사람들을 구경했다.

 

 

쑤저우제를 지나서 만수산에 오르는 길이다. 이화원에는 호수와 산이 있는데 모두 인력을 동원하여 인공으로 만든 호수와 산이다. 호수는 곤명호, 산은 만수산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나 어마어마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중국은 사람도, 건물도, 풍경도 지나치게 많고 넓고 크다. 

 

이화원은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황실정원이다. 금나라 시대인 13세기에 금산행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건축되었고 그 후 약 750년간 역대 황제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은 곳이다.

이화원이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한 데에는 건륭제와 서태후의 공이 큰데 특히 서태후는 1860년 영프 연합군에 의해 소실된 이화원을 정부의 군비까지 빼돌려 재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약해져 있던 청의 군사력이 더욱 약해졌고 이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청은 그동안 나라로도 치지 않던 일본에 대패하여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화원의 재건이 청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것이다.

 

 

만수산에 있는 4대부주에서 바라본 모습. 4대부주는 티베트 건축 양식을 반영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축물이다. 4대부주 뒤에는 중향계 패방과 지혜해라는 1000여개에 달하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어 무량전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패방은 중국의 독자적인 건축물로 문짝이 없는 대문 형식의 건축물이다.

 

 

길을 걷다보니 이런 매점이 있었다. 각종 기념품과 음료수를 팔고 있었다.

 

 

중향계 패방을 지나 조금 내려오면 만수산 중턱에 이화원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인 불향각이 있다. 배운전과 마찬가지로 대보은연수사라는 황실 사원의 일부였다고 한다. 건립 당시에는 9층 석탑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8층까지 건설했을 때 건륭제의 마음이 변해 석탑을 헐고 지금과 같은 불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1860년 영프 연합군과 싸울 때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로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누각의 높이는 약 41m인데 20m 높이의 석조 기단 위에 지어져 만수산 아래에서 볼 때는 실제 높이보다 2배 정도 더 높아 보인다.

 

그런데 그 20m 석조 기단이 모두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어 올라갈 때, 내려갈 때 다리가 후들거려 혼났다. 계단 폭도 좁고 느낌상 경사가 70도 정도는 되어 보였다. 잘못하다간 뒤로 넘어질 것 같아 어찌나 긴장되던지. 그런데 그 가파른 계단을 유모차를 끌고 올라온 이슬람 부부도 있었다. 혼자 올라가기도 힘든데 유모차에 아이까지 어떻게 올라간담. 더 아찔한 이야기는 서태후가 이 곳에 불공을 드리러 오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분명 걸어가진 않았을테고 가마를 타고 올라갔을 것 같은데 가마꾼들은 어찌 올랐을까. 생각만해도 끔찍.

 

 

 

 

불향각 아래 장랑이 화려하고 아름다워 찰칵

 

 

 

 

 

 

불향각에 올라 바라본 오른쪽 모습

 

 

불향각 안에 모셔진 천수천안관음상. 서태후가 여기에서 불공을 드린 것이군.

 

 

불향각을 둘러싸고 있는 석조 울타리. 돌에 새긴 무늬가 정교하고 화려하다. 기계도 없었던 옛날에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고 유려한 무늬를 만들 수 있었을까.

 

 

 

 

불향각 모습. 너무 높아 프레임에 전체를 다 넣을 수 없었다.

 

 

불향각에서 바라 본 곤명호와 북경 시내의 모습

 

 

불향각의 모습

 

 

불향각에서 바라 본 곤명호

 

 

불향각에서 바라 본 북경 시내의 스카이 라인

 

 

불향각에서 내려다보면 배운전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인다.

 

 

불향각에서 바라 본 보운각의 모습

 

 

 

 

불향각으로 올라가는 경사가 70도는 되어 보이는 가파른 계단. 너무 무서웠다.

 

 

불향각의 왼쪽에 있는 보운각.

건륭제 재위 시절인 1755년에 건설되었다. 높이는 7.5m, 무려 41만 4천근(약 207t)의 동을 녹여 제조했다 하여 동정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인 건축 기법은 목조 건축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으로 만들어져 1860년 영프 연합군과 싸울 때에도 소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화원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륭제 당시의 건물이다.

 

 

불향각을 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다시 내려왔다.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는 건물들

 

 

 

 

여기가 곤명호. 너무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사람들이 유유자적 배를 타면서 노닐고 있다.

곤명호는 면적이 210만 제곱미터로 20세기 이전에 건설된 관상용 인공 호수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이화원 전체 넓이가 290만 제곱미터이니 곤명호는 이화원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둘레가 약 8km 정도 된다고 한다.

최초 건설은 원대인 12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래는 당대의 수리학자인 곽수경에 의해 건설된 관개용 저수지라고 한다. 명대에 이르러 호수 주변에 나무와 꽃을 심어 황실정원의 모습을 갖추었고 청의 건륭제 때 대대적으로 개조, 보수하여 소주의 아름다운 호수 서호와 같은 서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영프 연합군에 의해 폐허가 되자 서태후가 군비를 빼돌려 호수를 두 배 정도 확장하고 복원하여 지금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이화원 복원 사업으로 황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자 했으나 그로 인해 청이 멸망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

 

 

역시 사람들은 많고.

 

 

 

 

 

 

 

 

청안방

곤명호 동쪽 끝 만수산 맞은편에 떠 있는 길이 36m의 돌로 만든 배. 석방이라고도 한다. 청나라의 전성기인 18세기에 건륭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선체만 돌이고 배 위의 누각은 목조였는데 1860년 영프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린 뒤에 다시 돌로 누각을 지었다고 한다. 돌배가 호수 위에 건설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춘추시대 사상가였던 순자가 했던 말, '군자주야 서인자수야'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임금은 배고, 백성은 그 배를 받치는 물'이라는 뜻으로 백성들은 임금을 떠받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배를 엎어버리기도 하니 백성 무서운 줄 알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서태후는 이 곳을 복원하고 보름달이 뜨는 밤에 서양식으로 재건한 청안방 누각에 올라 시를 읊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청나라는 멸망의 길로 서둘러 가고 있었다.

 

 

길을 걷다 만난 아름다운 석조 다리

 

 

 

 

점심은 이화원 내의 식당에서 먹었다. 소고기를 넣은 카레 덮밥(30위엔, 약 5,340원). 우리나라 카레와 맛이 비슷했다.

 

 

그 유명한 이화원 장랑. 무려 273칸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태후의 거처였던 낙수당에서 불향각이 우뚝 솟은 만수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728m 길이의 초대형 회랑이다. 불교신자로 유명한 서태후는 불향각으로 불공을 드리러 갈 때를 비롯해 개인적인 산보를 위해서도 장랑을 애용했는데 매 200m마다 있는 작은 정자는 서태후가 중간중간 쉬었던 곳이라 한다.

장랑의 대들보에는 무려 14,000점에 달하는 풍경, 민속, 신화 속 이야기들을 담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삼국지나 서유기의 이야기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배운전. 실질적인 이화원의 정전이다. 18세기 중반 건륭제가 최초 건설했는데 그 당시에는 대보은연수사라는 황실 사찰의 대웅전이었다. 그 후 서태후가 재건했는데 정작 황제는 사용하지 못했고 서태후의 생일 때마다 문무백관과 황족들의 축하인사를 받는 곳으로 쓰였다.

 

 

배운전 입구를 지키고 있는 동사자상. 우리는 너무 피곤하고 다리가 아파 이 곳 돌계단에 앉아 잠시 쉬었다.

 

 

이화원을 보고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탔다. 해당 지하철 역에 도착하면 노선도의 해당 역의 불이 꺼진다.

 

 

북경 시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자전거 대여소. 시에서 운영한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홍웨이 이지아 베이징 왕푸징 호텔' 이름이 길기도 하다. 트리풀룸으로 하루에 458위엔(약 81,524원), 6박에 약 48만원 정도였다. 보통 수준의 숙소. 하지만 묵는 중에 바디워시가 떨어져 다시 채워달라고 했더니 줄 수 없다고 했다. 왜 안되는 거지??

 

 

TV도 있고

 

 

화장실 말고 방에 세면대가 하나 더 있어서 편리했다.

 

 

샤워부스

 

 

화장실

 

 

저녁으로 첫날 갔던 '사계민복'에 갔는데 그 때보다 더 늦은 시간에 갔더니 대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밤 10시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골목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내장 같은 것이 들어가 있었는데 맛은 괜찮았다.(15위엔, 약 2,700원)

 

오늘은 너무 피곤하였다. 중국의 관광지는 정말 넓고 크다.